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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2012

가공의 세계 리플리 증후군-태양은 가득히, 리플리





무심결에 내뱉은 사소한 거짓말을 바로 잡지 못하고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반복적으로 거짓을 일삼다가 현실로 착각 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이 사람을 잡는다는 조상님의 말씀도 있는 것이겠죠. 말이 약이 될수도 칼이 될수도 있다는 맥락과 같습니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 puple noon’ 리플리 The Talented Mr. Ripley’는 리플리 증후군이란 심리학용어를 만들어 냈을 만큼 보잘것없던 인간이 우연히 상류층 사람을 만나 신분상승을 꿈꾸게 되면서 현실과 가상의 삶을 구분하지 못한채 자신마저 속이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1960년 만들어진 영화 태양은 가득히을 리메리크한 작품이 리플리입니다.


상류층 사람들 즉, 원래부터 돈 많은 자들은 사회 전체를 들여다보지 않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세상 사람을 접하면 호기심으로 잠깐은 좋아할 수 있지만 살아온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오래는 사귀지 못하게 되죠. 상류층 사람들과 계속 섞이고 즐기며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톰 리플리(맷 데이몬)에게 디키 그린리프(쥬드 로, 모리스 로넷)는 곧 톰에게 싫증을 내고 조롱과 비아냥을 일삼습니다. 더군다나 방탕하고 여색을 즐기는 상류층 사람인 디키에게 톰은 그저 노예나 장난감 같은 존재였던 것이죠.


하지만 현실을 착각한 톰에게 디키는 몇 번에 걸쳐 주의를 주지만 항상 그때뿐, 비굴한 행동과 거짓말로 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둘의 마지막 여행 중, 디키의 조롱 질에 결국 참지 못하고 톰은 우발적으로 디키를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디키의 패스포드와 서류를 위조하여 디키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스토리입니다. 두 영화의 내용은 전체적으로는 같지만 설정이나 엔딩 부분은 다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알랭 드롱이 출연했던 1960년도 작품 태양은 가득히가 가장 마음에 듭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리플리 증후군을 앓는 사람은 이외로 많습니다. 인터넷의 발달은 또 다른 사회를 구축하여 가상의 삶 즉, 거짓으로 자신을 과대 포장하여 사람을 만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가공된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죠. 자신이 왕이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는 가상의 세상은 일면식이 없는 사람도 실제연인처럼 만든다든지, 사기를 당한 것으로 착각한다든지, 버림 받았다든지 착각하여 주위에 있는 친한 사람들을 유혹하여 무고한 인간을 파탄 낼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존재입니다. 저 또한 실제 경험했던 사실입니다.


정치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전에 강용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모 언론인의 질문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런 말을 했더군요.


제가 뭐라고 한적 없었는데, 혼자 얘기하고, 혼자 나가 떨어지곤 저에게 스나이퍼라고 하더군요


일종의 리플리 증후군을 앓는 강용석같은 부류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주위에 많습니다. 혼자 사기 당했다고 하고, 혼자 억울해 하고, 혼자 공갈치고, 혼자 나가 떨어지곤 저에게 사기꾼이라고 매도했던 사람도 봤습니다만, 이런 자들이 현실과 이상을 혼돈하여 사회, 정치판을 위험하게 비틀어 버리고 반성은 절대 안 합니다.


물론 누구나 꿈을 안고 성공을 위해 달리는 건 당연하지만, 대부분 이룰 수 없다면 좌절하더라도 현실을 파악하고, 대안을 만들어 새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리플리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은 가공의 세계를 만들어 숨어버리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죠.



문대성, 손수조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이 거짓을 낳고 반복적으로 만들어 즉 가공의 세계에 살아가는 인물들이라는 것이죠. 동조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가공의 세계에 빠져 든 노예밖에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문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건 사회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도덕적 기준과 합리적 판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반칙을 해서라도 야망을 달성하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죠.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망가지고 부패에 찌들게 됩니다.


소소한 거짓말이나 허위사실을 니가 남이가 하는 으로 감싸주는 모순된 사회는 원칙에 충실하고 성실한 자를 내치기 때문에 건전하게 사회발전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자신은 올바르지 못하면서 타인에게 올바르게 살라고 한다면 사회가 한참 잘못된 것이죠.


올바른 사회는 도덕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합리적 기준과 판단이 따라야 합니다. 또한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이 욕심보다 명예가 아닌지요?


과연 우리 사회는 이 기준에 부합한지 깊이 새겨봐야 할 것입니다.

4/20/2012

August Rush-운명적인 사랑





영화 '어거스트 러쉬 August rush'는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했던 남녀가 어쩔 수 없이 헤어지고, 버려져야 했던 아이와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매년 봄은 미 대학의 졸업 시즌이기 때문에 쥴리아드 음대 또한 졸업연주로 바쁩니다. 쥴리아드 졸업생 라일라(케리 러셀)는 연주회를 마친 후 어느 파티에서 미 서부(샌프란시스코)에서 뮤지션의 꿈을 쫏아 맨하탄을 찾은 루이스(조나단 리스 메이어스)를 만나면서 둘은 뜨거운 사랑을 나눕니다.

하지만 훌륭한 음악가로 성공하길 기대하는 라일라의 아버지가 둘을 가만 놔둘리가 없겠죠. 임신 사실도 모른채 루이와 라일라는 헤어지게 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태어난 어거스트 러쉬(프레디 하이모어)는 입양기관으로 보내져 시골에 자라게 됩니다. 물론 라일라도 유산되었다는 아버지에 거짓말로 러쉬의 존재 조차 모릅니다.

좀 설정이 그렇죠? 하지만 이 또한 운명이니...

이 아이의 귀에 들리는 자연의 숨결과 시끄러운 소음등 모든 소리는 음악으로 연주합니다.

11년여를 어쩔수 없이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했던 소년은 언젠가 만난다는 생각으로 결코 혼자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바람에 넘실거리는 보리밭에서의 노래,
창가를 두들기는 바람의 노래,
바람에 두들겨 맞아 아름다운 악기를 연주하는 풍경의 노래 등

이 모든 소리를 사랑하는 소년입니다. 언젠가는 자연의 숨소리가 부모에게 전달되어 자신을 찾아 줄 것 이라는 믿음으로 절망도 하지 않습니다.





Music Is All Around Us All You Have to Do Is Listen
음악은 우리곁에 있다우린 그저 듣기만 하면 된다.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지만 뉴요커로서의 삶이 풍족 스러울때가 많습니다. 

이 영화를 보시면,

New York 대학 캠퍼스가 여기 저기 깔려있는 워싱톤 스퀘어팍 언저리쯤 어느 건물 옥상에서 루이스와 라일라가 사랑을 나누었던 곳, 러쉬가 기타 연주로 앵벌이 하는 장소로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곳 워싱턴 아치(개선문) 사이로 예전에는 사라진 월 트레이드 센터 빌딩이 보였었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파크내에 체스를 두는 장면은 다른 영화에서도 많이 나옵니다.

러쉬가 생전 처음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숨소리를 듣고 놀랐던 타임 스퀘어위저드와 러쉬가 서브웨이 교각밑에서 비즈니스를 이야기 하던 업퍼 브로드웨이, 브로드웨이는 유일하게 업타운에서 다운타운까지 이어지는 길입니다. 러쉬가 위저드의 도움으로 극장에서 도망쳐 잠든 흑인교회는 업퍼 브로드웨이가 125가(마틴 루터 킹 스트리트)를 가로 지르는 할렘 타운에 있을 것 같습니다.

뉴욕대학 캠퍼스를 끼고 있는 Irving Plaza., 이스트 빌리지에 있는 Fillmore East 극장, 하지만 세트장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쪽은 서브웨이가 지하로 다니지, 지상으로 다니지 않습니다. 위저드와 러쉬가 대화할 때 서브웨이가 지상으로 있는 건 할렘쪽에서 촬영한거 아닌지 생각이 듭니다. 서브츄레인이 컬럼비아 대학교 못 미쳐 지하로 들어가게 되죠.

영화 'Home alone'에 자주 등장했던 플라자 호텔 그리고 맞은편 러쉬의 앵벌이 장소와 루이스가 러쉬의 연주를 보기 위해 달리던 컬럼부스 서클, 컬럼부스 동상은 센츄럴 팍의 시작 부분인 59가 입니다. 

로빈 윌리엄스는 갠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코미디언이자 배우이죠. 그를 처음 접했던 영화가 '발디미르의 선택, Mocow on the Hudson'입니다. 

서커스 단원이자 섹소폰 연주자인 로빈이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해, 사랑에 속고, 돈에 속으면서 웃고 울리는 코미디 영화인데 사실 미소 냉전시대에의 영화라 현재 보면 어떤 감흥이 올까 새롭습니다. 결국 소련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번 보고싶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로빈 윌리엄즈의 연기 또한 이 영화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4/17/2012



그 동안 블로그에 포스팅하면서 대한민국 사회의 도덕적 판단과 기준은 무엇이고 어디까지일까 라는 의문점을 항상 가져왔습니다. 이번 김구라, 김용민 사태를 접하면서 한가지 확인한 사실은 그때마다 사회가 요구하는 판단과 기준이 다르거나 없다 None’ 였습니다.


공인으로 불리는 유명인은 신적인 영역이고 그들의 말 한마디는 청소년에게 유해할 수 있다는 구실로 대중의 엄격한 검열대상이 된지 오래입니다. 1950년대의 메카시즘도 항상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구실로 대중을 억압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입맛대로 억압하면 안 되는 것이죠. , 표현의 자유, 인간이 살아가면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국회에서 인터넷 악법 날치기 통과의 경우에서 보듯, MB정부는 소통을 하지 않고 국민을 못 살게 구느냐면서 여러분은 표현의 자유를 달라고 했습니다. 미네르바가 구속되면서 억압된 표현의 자유에 대해 검찰에 대해 분노했고, 행정, 사법기관이 혹시라도 자신의 글을 사찰할까봐 스스로 검열하고 현정부를 원망하면서 또 다른 이에게는 표현의 자유를 스스로 억압하고 엄격한 기준을 들이댑니다.


뭐 이런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기준을 들이대는 비합리적인 사회가 있을까요?


누누이 강조해 왔지만 집단이기주의 근성을 가진 자들의 편파적이고 조직적인 모습은 정말 무서울 정도입니다. 자신과 연관된 정치인, 직업 혹은 지역이 방송사, 언론에서 나쁜 이미지로 보여지면 열변을 토하면서 성토하고 적극 항의합니다. 모든 것을 보여달라면서 또 그러지 말라는 꼴입니다. 미국 NBC SNL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런 기준이면 미국의 모든 코미디언과 프로그램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겁니다. 도대체 무엇을 보여달라는 것이죠?


이명박정부 들어서 더욱 심해진 물타기 이슈만 하더라도 패륜정치인들의 대형이슈가 터졌을 때 수구세력은 물타기가 필요했고 나꼼수 죽이기로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김용민을 응원했던 김구라도 연좌제로 심판하고 그의 잠정은퇴로 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곽노현 교육감의 2심 판결이 유죄로 귀결되었습니다. 총선 이후 대선구도를 위해 새누리는 일찌감치 세력을 규합하여 제거 정리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올렸던 영화 ‘Good night, and good luck’ 감상평에서도 밝혔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모순된 이런 혼돈은 마치 1950년대의 메카시즘 논쟁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수구세력이 항상 그래왔듯 표현의 자유와 도덕적 기준없이 대중을 속이고 이념으로 몰아 성공하고 있다는 겁니다.


총선이전부터 시작된 표현의 자유 논란과 도덕적 가치 기준의 싸움은 현재까지 진행형입니다. 다자구도인 총선은 절대 몰방할 수 없는 구도이기 때문에 야권의 각 지지세력은 서로 이전 투구하지 말고 각자의 지지 지역구에 몰방했어야 되었지만, 그들은 지향점이 같은 상대방을 깊게 상처 주면서 루비콘강을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는 득표수에 이기고도 새누리당에게 1당을 헌정했습니다. 물론 흔들리지 않는 37-40%의 수구세력이 있기 때문에 새누리의 1당이 가능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쓸데없는 소모전이 적어도 투표율 상승효과에 반감을 가져왔던 건 분명한 사실이고 야권의 이전투구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사실 수구들만큼 인터넷 공간에서 악랄하고 조직적인 집단은 없을 겁니다. 포털에 올라오는 그들의 패륜적인 댓글을 보고 있으면 구토현상까지 일으킬 정도의 저렴한 글이라는 사실쯤은 여러분도 쉽게 동의할 겁니다. 수구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좌우를 막론하고 논리적이지도 못한 근거 없는 말로 인격살인 파도타기를 할 때는 뭐 이런 사회가 있을까 하는 절망감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극성지지자들이 정치에 혐오감을 주고 있고, 빠가 까를 양산하는 모순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이죠.


지난 여름 서울여행 때, 부산 모 정당의 패거리들에게 조직적인 인격살인으로 상처를 받았던 입장이기 때문에 이번 총선결과에 대해 충격은 크지 않았지만 사회에 요구하는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에 부합해야 함에도 자신의 입맛대로 편파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말쟁이가 다시 재 보궐 선거에서 심판 받겠다 뻔뻔하게 말하고 그들의 저렴한 어록을 받아 그대로 뉴스로 내보내는 비정상적인 언론이 자리잡을 수 있는 사회구조입니다.


비틀어지고, 그릇되고 반성하지 않는 사회는 전진하지 못하고 항상 제자리 걸음이거나 후퇴합니다. 도덕적 위기의 시대는 분명 맞습니다.


지난 서울시장 재 보궐 때, 나경원의 자위대 행사 참가에 대해 비판했던 글을 수사해 달라고 검찰에 청탁했던 나경원 남편의 불합리한 행동에 심한 분노를 드러내면서 또 다른 잣대로 표현의 자유를 스스로 억압하는 이런 모순적인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인지 깊게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깨어난 시민이란 객관적인 눈으로 사안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판단해야지 자기편이란 이유로 편파적인 행동을 일삼는다면 집단이기주의 근성의 사회로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진보라면서 수구와 같은 행동을 일삼고 도덕적 기준 없이 자신의 입맛대로 좌우된다면 대단히 불행한 사회입니다. 제발 깊게 생각하고 또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God)은 김용민, 김구라에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사회의 부당함에 항거하도록 고행의 길을 주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4/16/2012

쉐임 Shame, 노토리어스 베티 페이지, 신과의 대화



도저히 헤어나지 못할 무력감과 절망에 빠졌을 때 신은 당신에게 길을 제시해 주지 않습니다. 신이 존재를 나타낸다면 악한자가 지배하는 세상이란 결코 없겠죠.


꽤 오래 전, 맨하튼에서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할 때 이른 아침, 조지 와싱톤 브릿지를 건너 Deegan Express Way 남쪽 방향 양키스 스태디움 근처를 지나치다 앞 차량들의 충돌사고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왔던 적 있었습니다. 차량이 충돌을 하면 먼지 같은 연기와 파편들이 튀는 것도 처음 목격했습니다만 차를 멈추고 뒤를 봤을 때 차량이 빠져나올 공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도 기적이라면 기적이겠죠 신의 존재로 언급한다면.


그래서 신을 부정하면서도 신은 있다고 믿습니다 아직도. 비록 기복 신앙인이지만


영화 ‘신과의 대화, Conversations with God’은 잘 나가던 라디오 DJ가 교통사고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인생의 나락에 처하여 노숙자 생활을 전전하다 신의 기적(혹은 신의 존재감)으로 자신감을 되찾는다는 순전히 기독교적인 영화입니다. 반 기독적인 성향인 분들은 안 좋아하리라 예상합니다만 자신감을 상실한 시대에 사는 인간이 사회의 맨 밑바닥에 도달했을 때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상처 받아보지 않았던 자가 사랑에 대해 논할 수 없듯이.


미국은 1620년 종교개혁을 부르짖으며 도덕, 주일예배엄수, 금욕 등 세가지를 철저히 지키고자 했던 영국의 청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여 건설한 국가이기 때문에 현재도 도덕적 가치를 우선시하고 사회 정치 전반에 걸쳐 버텨주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혹자들은 미국이 문란한 사회라고 착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이란 국가는 51개의 나라가 연방한 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언론이 주로 표현하는 미국의 어디이런 표현 보다는 어디 주, 어느 시티라고 표현을 해줘야 정확한 정보가 전달합니다만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유교사상과 비교를 하지만 고려시대의 무절제한 풍습의 영향으로 태어난 사상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계급사회와 인권을 중시하는 청교도와 비교하기는 그렇죠. 물론 인디언의 땅을 침략하여 땅을 뺏고 학살한 원죄와 흑인을 노예로 부린 역사도 있지만 당시 자국보다 해외로 눈을 돌려 더 넓은 땅을 개척한다는 유럽제국의 명분으로 얻은 대륙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기 때문에 천혜의 자원을 가진 비옥한 땅에 역사를 만들지 못한 인디언도 책임이 있습니다만 영화 ‘The mission’ 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당시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의 국가와 종교를 놓고 보면 양심과 싸워야 했던 종교지도자의 갈등과 고민의 흔적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뉴욕, 맨하튼 42가는 미국 각지로 향하는 버스 스테이션을 축으로 뉴욕의 섹스산업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불결한 냄새, 바로 씻어야 안심할 수 있는 더러운 칸막이 사이로 보이는 벌거벗은 여자들의 흐느낌을 카운터에서 코인을 바꾸어 구멍 혹은 유리칸막이 사이로 구경하는 섹스샵이 타임스퀘어에서 9번가에 걸쳐 많았고 해외에서 오는 남자들이 뉴욕의 저녁 문화로 순례하는 곳이었습니다. 섹스샵을 끼고 많은 패들러들이 휘황찬란한 브랜드 모자, 셔츠, 커스톰 쥬얼리 등 복제품을 팔았던 꽤 유명했던 곳이고 한국계 장사꾼들도 꽤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에는 불탄 빌딩창문에 합판으로 덧대어 논 빌딩들과 노숙자들의 모습은 흔히 찾아볼 수 있었던 풍경이지만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의 발달과 뉴욕시 검찰총장 출신인 뉴욕시장 루디(루돌프 줄리아니)의 마피아 소탕작전과 겹쳐 쇠락을 거듭하다 2000년대 초반 컴퓨터 공간으로 사라져 버리고 현재 42가는 유명 백화점과 뮤지컬 극장으로 채워져 고급 스트립 바를 제외하고는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영화 ‘The notorious Bettie Page’ 에서도 당시 1940, 50년대의 42가를 보여줍니다. 당시 성인잡지 핀업 걸로 유명했던 남부 테네시출신 패이지는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입학할 정도로 꽤 똑똑한 여자였지만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상습적인 강간을 당하고 이후 첫 번째 결혼의 실패와 여러 남자들에게 윤간(gang bang)을 당하기도 합니다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연기자의 꿈을 키우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하여 연기자 공부를 하게 되고 어프 브로드웨이 몇 작품에 출연하기도 합니다.


한국전이 발발하던 1950년 사진작가 제리 팁을 만나면서 모델활동을 시작하고 어빙 클라우를 만나면서 패이지는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사실 1950년대는 헤어 누드도 금기 시 되던 사회라 본디지는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SM적인 본디지 모델 촬영을 하게 됩니다.


누드를 자연스럽게 생각했고 사람을 너무 믿었던 패이지는 전문모델이 해야 될 숙명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순수한 여자였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고 이용만했습니다. 그녀의 본디지 영화, 사진 등이 청소년에 유해하다는 당시의 사회풍습으로 청문회에도 불려 나가기도 하고 그녀가 출연했던 본디지 영화는 상영금지를 당합니다.


마이애미 플로리다에서 뉴욕의 유명 사진작가 버니 이거를 만나 플레이보이지 플레이메이트로 선정되기도 하지만 교활한 바람둥이 휴즈의 만남을 거절합니다. 그만큼 패이지는 자신의 가치관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던 여자이자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마이애미 해변가를 거닐다가 본 교회의 십자가를 보고 선교에 충실하게 되면서 모델을 그만 둡니다.


때로 종교의 부정부패는 사회기반의 도덕적 가치를 허물기 때문에 원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종교가 신성함을 지킬 때 나약한자와 좌절한 자들에게는 위안을 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내가 신을 부정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물론 전제조건이 붙지만 종교에서는 그것 또한 정신적으로 나약해서라고 말합니다.


맨하튼 42가에서 사라진 섹스산업은 인터넷 공간으로 숨어들어 그 영향으로 많은 섹스중독자를 만듭니다.


영화 ‘Shame’은 문명의 발달, 인터넷의 발전의 영향으로 늘어난 섹스중독자(Sexual addiction)를 이야기해 줍니다.


보통 정신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브레인 중 전두엽부분이 훼손되면 충동조절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거물 심리학자 프로이드와 융의 충돌을 다룬 영화 ‘A Dangerous method’에서 칼 융 역으로 출연한 마이클 패스밴더와 영화 ‘Drive’에 출연했고 요즘 잘 나가는 미묘한 매력의 여배우 캐리 멀리건 때문에 보게 되었지만 제한상영 R17보다 더한 파격적인 정사신과 근친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습니다. 딱히 근친에 대해 자세히 설명은 하지 않습니다만 남매의 대사에서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We are not bad people. We are just come from a bad place. shame.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죄를 짓는 것도 아니다. 나쁜 사람도 아니지만 부끄럽다.


어릴 때부터의 상처가 주는 고통은 성인이 되어서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겠죠. 비록 사회에서 성공을 하고 부를 가졌지만 그 상처는 이성을 사귀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주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섹스중독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상적인 사랑보다 변태적인 사랑을 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면 뭔가 문제가 심각하다는 겁니다.


아무튼 위에 언급된 영화가 모두다 인간의 상처를 주제로 다룹니다.


실패와 좌절감은 사회의 밑바닥까지 경험하게 되고, 남자에게 상처를 받고 세상에 속고, 어릴 적의 상처로 고통과 갈등을 겪는 현대인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주지만 결국 이겨내는 것도 인간이란 이야기입니다. 분명 신을 믿는 자에게는 그가 존재하기 때문에 의지하겠지만 인간 스스로 해결해야 될 문제라는 것이겠죠. 신을 의지할 수는 있지만 인간 스스로 해결해야 될 의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좀 무거운 주제를 가진 영화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사회 정치전반의 패륜적인 모습, 도덕적 가치가 실종된 사회와 정치, 맹목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지지하는 비틀어진 사회에 한번쯤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4/09/2012

 


사랑을 못 잊는 남자와 친구의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외로움에 남자가 필요한 여자,


영화 ‘접속’이 만들어진 해 1997년은 우리가 경험했던 현실의 만남이 또 다른 공간으로 확장되면서 가상의 공간에서 사랑, 그리움 등 어느 공간이라도 애달파하는 사랑은 마찬가지란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 이 둘은 현실의 공간, 극장, 레코드가게, 지하철 등에서 스쳐 지나가지만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지나칩니다.


옛 애인으로부터 언더그라운드 벨벳의 LP앨범을 받은 날, 누군가로부터 ‘Pale blue eyes’ 신청을 받고 혹시 그녀가 아닐까 하는 설렘에 둘은 메시지로 서로를 알아갑니다. 애초에 수현이 사실대로 이야기했거나 동현을 배려하지 않았다면 만남은 지속되지 않았겠죠. 하지만 둘은 사랑의 상처 때문에 조언자가 필요했고 시간을 이어갑니다.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과거의 상처 때문에 외로워 남자가 필요한 여자가 만났을 경우에도 사랑은 큰 상처를 만들어 내고 이뤄지기도 힘듭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상우와 은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만난 뒤에 허무하다면 한번쯤 생각해 봐야 될 사랑, 사랑은 외로워서 만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니까 괜찮아 라는 일방적인 사랑은 만용이거나 가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배려보다는 강요, 집착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관계로 발전하죠. 사랑은 가진 자가 잠시 뺏을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가질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마음까지...


“사랑이 변하는 거니?”


사랑에 아파서 엉엉 울고, 보고 싶어 그녀를 찾아가 맹목적으로 집착도 합니다. 배신감에 자동차 키로 은수의 차에 Scratch 낸 것보다 상우의 사랑은 더 깊은 아픔으로 남았을 겁니다. 욕구와 욕망을 다 가지려는 은수에게 상우의 사랑은 무능력하고 바보같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상우에게 할머니는 여자와 버스는 기다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남편의 바람기로 고생했던 우리 엄마적 사랑이 그랬듯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랑도 변하리라 생각하겠지만 사랑은 항상 그 자리입니다. 사랑은 설레고 아프니까요. 아프니까 사랑이고 설레니까 사랑이겠죠. 사랑이 흘러가는 강물이라는 걸 알면서 기다리는 사랑은 참 힘듭니다.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하면 사랑에 충실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상우는 사랑에 충실 하려고 하지만 은수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혼이라는 깊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여자, 그래서 남자를 믿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고 신중하게 처신하려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각기 처한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대하는 사랑도 달라질 수 있다고 순간 착각하겠지만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 감히 그 사랑에게 누만 끼친다는 겁니다. 상대방을 아프게 하는 사랑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정의를 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동현은 사랑을 쟁취하라고 수현에게 조언하고 수현은 용기를 내어 친구의 남자에게 달려가지만 친구로부터 뺏지 못합니다. 바라만 보는 사랑도 있다고 착각하는 여자가 친구의 남자를 뺏으려 했다는 건 사랑을 받고 싶었던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동현과 수현은 서로 조언을 해주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자신의 사랑에 충실하지 못합니다.


헤어진 여자를 못 잊는 남자와 친구의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 옛 사랑을 못 잊으면서 상대방에게는 잊으라고 합니다.


외로워 남자가 필요한 여자가 상처를 주고 다시 만나자고 합니다.


봄 입니다.


엄마적 사람들은 연분홍 치마 곱게 입고 봄맞이 벚꽃놀이를 갔었겠죠. 혹시 우리는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사랑보다 욕정을 논하는 건 아닌지요? 사랑은 배려해야지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집착하고 의심하면서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이 봄 모두에게 가슴이 아파 죽을 만큼 보고 싶고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고 싶은 아름다운 사랑이었으면 합니다. 당신이 지금 하는 사랑이 욕구를 충족하고 싶은 사랑이 아닌지 되돌아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은 설렘으로 행복하지만 또 그만큼 아픈 게 사랑입니다.


사랑이 생각나시면 영화 ‘봄날은 간다’ 와 ‘접속’을 보시기 바랍니다. 두 영화 속 내내 흐르는 음악도 정말 좋습니다.



4/07/2012

굿나잇 앤 굿럭-메카시즘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김용민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메카시즘으로 불려졌던 조셉 매카시 연방상원의원의 빨갱이 리스트 논란으로 서로 반목하고, 스스로 사상검열까지 할 정도로 미국사회를 일대혼란에 빠트린 미국정치역사상 치욕적인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영향은 우리나라의 빨갱이(Reds) 이념논쟁으로 고스란히 남아 진보개혁론자와 정적을 묻을 때 이 논란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당시 2차대전이 후 1950년 초반, 미소 양축으로 갈라지는 냉전시대로 접어들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메카시가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공화당지지자 모임에서 언급한 빨갱이 리스트에 대해 의심이나 검증을 하자는 사람이나 조직이 없었다는 겁니다. 러시아(당시 소련) 스파이가 미국의 핵 정보를 빼돌려 이미 핵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에 각 정부기관에 스파이 및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그의 발언을 기정사실처럼 믿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메카시는 자신의 정적이나 자신의 논리에 배치되는 인물은 공산주의자로 매도하여 찰리 채플린을 비롯한 유명인사들을 연좌제, 감금, 고문 및 해외로 추방시켰습니다. 심지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까지 공산주의자로 매도했습니다.


세월이 60여 년이 흘렀음에도 우리나라의 현 상황과 아주 비슷하지 않습니까?


돈키호테 같이 두각을 나타내고 싶었던 한 정치인의 잘못된 메카시 열풍을 그 누구도 파헤치지 못할 때, 영화 ‘Good night, and good luck’은 이 사건을 바탕으로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메카시와 맞섰던 CBS의 시사 프로그램 ‘See it now’의 앵커 에드워드 머로와 그 팀의 이야기입니다. 타이틀 굿나잇 앤 굿럭은 프로그램을 마칠 때, 머로의 인사 멘트 였습니다. 그리고 골수 민주당원 조지 클루니가 감독하고 피디역으로 출연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국민 스스로 사상검증을 하게 만든 이 메카시 열풍 때문에 머로 팀은 많은 난관에 봉착합니다. 공산주의자로 매도 된 가족들은 연좌제로 고생하였고, 이런 일을 파헤쳤던 머로 팀은 사회로부터 빨갱이로 의심받기도 하여 같은 팀의 일원이 자살하는 사태까지 겪게 됩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회는 편파적인 자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겠죠.


물론 당시 미국에도 권력의 도구로 사용되던 조중동과 같은 언론이 있었고 현재도 있지만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등 주류언론들은 머로 팀을 지지하며 힘을 실어주게 됩니다. 실체에 접근할수록 메카시 리스트의 허술한 점이 노출했고 결국은 언론의 진실접근으로 미 국민은 사태파악을 하게 됩니다. 결국 의회에서 메카시에 대한 비난 결의안이 통과가 되기에 이릅니다.


항상 누누이 강조하지만 올바른 사회정의를 위해서 언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겁니다. 오너의 뚜렷한 철학도 있어야 하지만 편집권의 독립이 보장되지 못하면 독자에게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합니다. 힘있는 자에게 굴복하여 권력의 도구로 이용된다면 진실은 왜곡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권을 무시했던 시기에 이념보다 인권을 강조했던 것은 올바른 언론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사회는 이념보다 인권을 중시하는 국가가 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메카시와 연관된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이 흉악범을 교정한다는 구실로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래즈 섬에 최신식 교도소를 지어 인권을 멸시할 때 올바른 사실에 앞장섰던 것도 언론이었습니다. 물론 훌륭한 변호사의 뒷받침도 있었지만 언론이 사실을 왜곡했다면 여론은 형성되지 못했고 진실에 접근하지 못 했을 겁니다.


요즘 김용민의 과거발언이 소셜 네트웍과 모든 포털을 강타하고 있습니다. 수구집단은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현정부의 부도덕한 불법사찰과 잘못된 정책의 오류보다는 김용민의 과거발언으로 물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수구세력의 이런 행동이 정당한가요?


김용민의 과거 콴타나모 인권발언은 표현의 자유이지 이념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전세계가 경악했던 과거 부시정권의 끔찍한 사건을 두고 그것도 성인방송에서 했던 발언이 이토록 욕을 얻어먹어야 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새누리당으로 대변되는 정치인들의 사대주의 사상은 접더라도 조중동식 문맥으로 짜깁기 편집해서 총선에서 필승하고자 하는 비윤리적인 수구세력의 모습이 눈물겹도록 처절합니다.


표현의 자유는 스스로 지켜야지 입맛대로 스스로 억압하면 안 되는 것이죠.


집단이기주의 근성에 빠져 자신의 편이 아니란 이유로 행하는 이런 못된 행동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는 건 아닌지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